성북구
도성 북쪽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숭신방과 인창방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 때에는 동서(東署) 숭신방 동문외계 동소문외계와 인창방 동소문외계 지역이었다. 일제시대- 1910년에 한성부가 경성부로 고쳐지고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성외(城外)의 8방은 8면으로 고쳐졌는데 이때 성북구는 경기도 숭신면과 인창면이라 하였다. 그 뒤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하여 소위 '부ㆍ군의 명칭, 위치 및 관할구역의 개정'이 있었는데 숭신면 일원과 인창면의 많은 지역을 합하여 고양군 숭인면으로 개편하여 성북구의 많은 지역이 서울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때 당시 숭인면으로 편입된 마을은 성북리ㆍ신설리ㆍ안암리ㆍ종암리ㆍ 미아리ㆍ 돈암리ㆍ 정릉리ㆍ 번리ㆍ 수유리ㆍ 우이리ㆍ 답십리ㆍ 전농리ㆍ 청량리ㆍ 회기리ㆍ 휘경리ㆍ 이문리ㆍ 장위리ㆍ 석관리ㆍ 상월곡리ㆍ 하월곡리ㆍ 제기리ㆍ 용두리였다. 그 뒤 1936년 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해 경성부 관할구역 확장이 있어 고양군 숭인면의 안암리ㆍ성북리ㆍ종암리ㆍ 돈암리ㆍ 답십리ㆍ 전농리ㆍ 청량리ㆍ 회기리ㆍ 휘경리ㆍ 이문리ㆍ용두리(정릉리 일부가 이때 돈암리에 편입되었다)등 일부 지역이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일제식 동명인 정(町)으로 바뀌어졌다. 그 뒤 1943년 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구제도 실시에 따라 돈암ㆍ창신ㆍ숭인ㆍ신설ㆍ용두ㆍ안암ㆍ제기ㆍ청량리ㆍ회기ㆍ이문ㆍ휘경ㆍ전농ㆍ종암ㆍ답십리ㆍ성북동이 동대문구에 편입되었다. 광복이 된 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고유한 우리말로 고칠 때 동(洞)으로 개정하였으며, 그 뒤 1949년 대통령령 제 159호에 의해 성북구가 신설되어 동대문구 일부 지역과 고양군 숭인면의 새로 편입된 지역을 합하여 성북구에 소속시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길음동
우리 말 '기리묵골' 또는 '기레미골'을 한자로 고쳐 쓴 데서 연유된 동명. 기리묵골은 의정부 방면에서 혜화문(동소문)을 통과하여 도성 안쪽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미아리고개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 이 고개는 경사가 완만하고 정릉천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골짜기가 길게 형성되었고 골짜기가 길게 놓여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기리물골 또는 기레미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과 이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하도 맑고 고와서 물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기분이 맑아지므로 좋은 노래소리가 들리는 동네라는 뜻으로 길음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때에는 한성부 동서(東署) 숭신방(성외) 동소문외계 미아리에 속하였다. 그 뒤 일제침략으로 인하여 한성부는 경성부로 개칭되어 경기도에 예속되었으며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경성부의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도성안은 5부 36방으로, 도성 밖은 8개 면으로 나눈, 즉 5부 8면제를 시행할 때 길음동은 경성부 숭신면 미아리 불당동이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경기도 내 각 면의 명칭과 구역을 새로 제정할 때 5부 8면제가 폐지되는 대신 8면 중 일부가 경성부에서 관할하고 일부는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되었는데 이때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미아리에 속하여 변동없이 내려왔다. 그 뒤 1949년 대통령령 제 159호에 의해 동대문구에서 성북구가 분리ㆍ신설되고 제 160호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성북구 관할이 되어 미아동에 속했으며, 1973년 대통령령 제 6548호에 의해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리 신설되어 도봉구에 속했으며, 1975년 대통령령 제 7816호에 의한 관할구역의 변경과 서울시조례 제 979호로 도봉구 미아동 일부가 성북구로 편입되면서 길음동으로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돈암동
현재 미아리고개를 전에는 되너미고개라고 칭하였는데 이 고개 이름을 한자로 옮겨 돈암현이 되었고, 고개 이름에서 유래된 동명. 되너미고개는 병자호란 때 오랑캐, 즉 되놈이 서울에 침입할 때 이 고개를 넘어왔으므로 되너미재, 되너미고개, 적유령(狄踰嶺)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때에는 한성부 동서(東署) 숭신방(성외) 동문외계 돈암리가 되었다. 그 뒤 일제강점기인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5부 8면제의 시행과 함께 한성부가 경기도에 예속되면서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돈암리라 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일제는 다시 경성부 행정구역을 개편 축소시키면서 돈암동을 삼선평과 통합시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라 하였으며, 1936년 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해 일제는 다시 경성부 구역을 확장하면서 돈암동을 경성부에 편입, 돈암정이라 하였으며 1943년 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구제(區制)를 실시하여 동대문구에 속하였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돈암동이 되어 동대문구에 속했으며 1949년 대통령령 제 159호에 의해 성북구가 신설됨에 따라 돈암동은 성북구에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선동
인접해 있는 동소문동과 삼선동에서 각각 그 첫글자를 따서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때에는 한성부 동서(東署) 숭신방(성외) 동문외계 돈암리에 속하였다. 그 뒤 일제강점기인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경성부 숭신면 돈암리에 속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경성부 행정구역을 개편 축소시켰는데 이때 동선동은 경기도 고양군 돈암리에 속했으며 그 뒤 1936년 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해 경성부 구역을 확장하면서 동선동은 경성부 돈암정에 속했으며 1943년 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구제(區制)를 실시하여 동대문구에 속하였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동대문구 돈암동에 속했으며 1949년 대통령령 제 159호에 의해 돈암동은 동소문동ㆍ삼선동ㆍ동선동과 돈암동으로 분리되고 신설된 성북구에 속하였으며, 그 뒤 1963년 법률 제 1172호에 의해 이들 지역은 다시 지리적 조건에1ㆍ2ㆍ3ㆍ4ㆍ5가로 구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소문동
서울의 4소문(小門)의 하나인 '동소문'의 이름을 따서 제정된 동명으로 동소문은 혜화문의 속칭으로 1929년에 헐려 현재는 남아있지 않지만, 조선 초 태조 5년(1396)에 도성을 쌓으면서 성문을 낼 때 이 문의 명칭을 홍화문이라고 지었다. 그 후 성종 15년(1484)에 신축한 창경궁의 동쪽 문을 홍화문이라고 해서 혼동을 막기 위해 동소문을 혜화문으로 고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때에는 한성부 동서(東署) 숭신방(성외) 동문외계 돈암리에 속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경성부 숭신면 돈암리에 속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종래의 숭신면과 인창면을 합쳐 숭인면으로 통합한 뒤, 동소문동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에 속했으며 그 뒤 1936년 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해 경성부 구역을 확장하면서 동소문 일대는 경성부 돈암정에 속하였다. 그 뒤 1943년 조선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구제도를 실시함에 따라 돈암정(동소문동)은 동대문구에 속하여 광복을 맞았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동대문구 돈암동에 속했으며 1949년 대통령령 제 159호에 의해 성북구가 신설되면서 성북구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63년 법률 제 1172호에 의해 돈암동에서 분리, 동소문동으로 하여 성북구에 소속되고 1ㆍ2ㆍ3ㆍ4ㆍ5ㆍ6ㆍ7ㆍ8가로 분동하여 현재에 이른다.
보문동
보문동 3가 168번지에 있는 보문사의 이름을 딴 동명으로 불가(佛家)에 의하면 몸체에 온갖 덕을 갖춘 것을 '보(普)'라 하고, 쓰임이 나타나는 곳을 '문(門)'이라 하는 것으로서 '보문'이란 곧 보살이 일체의 성덕을 모두 갖춘 상태에서 기회, 시기를 따라 그 묘용(妙用)을 보임을 말하는것이다. 보문사는 고려 예종 10년(1115) 담진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신설계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때에는 한성부 동서(東署) 숭신방(성외) 동문외계 신설동에 속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5부 8면제의 시행과 함께 한성부가 경기도에 예속되면서 보문동은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신설계 탑동 우선리ㆍ안암신리에 속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다시 성밖 지역 8면을 경기도 고양군으로 개편하였는데 이때 보문동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신설리에 속했으며 1936년 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해 경성부 구역을 확장하면서 보문동은 경성부에 편입되어 신설정에 속했으며 그 뒤 1943년 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구제 실시에 따라 동대문구에 속하였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동대문구 신설동에 속했으며 1955년 서울특별시조례 제 66호에 의해 신설동에서 보문동으로 분리되고 1ㆍ2ㆍ3ㆍ4ㆍ5ㆍ6ㆍ7가로 분동되었으며 1975년 대통령령 제 7816호에 의해 성북구가 신설되어 동대문구에서 성북구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삼선동
동소문 밖의 평평한 들판을 '삼선평(三仙坪)'이라 하였기 때문에 이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이다. 이 산선평이란 이름은 이 마을 남쪽 옥녀봉 봉우리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세 신선과 함께 옥녀가 놀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삼선(三仙)'이란 지명으로 보아 신라 때 화랑도들이 이 곳에서 심신을 단련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때에는 한성부 동서(東署) 숭신방(성외) 동문외계 삼선평 돈암리에 속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5부 8면제를 실시할 때 삼선동은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삼선평 돈암리에 속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지방조직을 자의로 통폐합을 단행 할대 숭신면과 인창면을 숭인면으로 하였으며 이때 삼선동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에 속했으며 1936년 총독부령제 8호에 의해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삼선동은 경성부 돈암정에 속하였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동대문구 돈암동에 속했으며 1949년 대통령령 제 159호에 의해 성북구가 신설되어 성북구 돈암동에 속했으며, 1963년 법률 제 1172호에 의해 돈암동에서 분동하여 삼선동이 되어 1ㆍ2ㆍ3ㆍ4ㆍ5가로 하고 성북구의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상월곡동
지금의 하월곡동에 있는 산의 형세가 마치 반달과 같다 하여 그 산에 연(連)해 있는 마을을 '다릿굴(골)'이라 부르는데서 연유된 동명으로 이 중 높은 지대에 위치한 지역을 웃다릿굴(상월곡동), 아래 지역을 아랫다릿굴(하월곡동)로 호칭했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때에는 한성부 동서(東署) 인창방(성외) 동소문외계 월곡상리에 였다. 일제는 1910년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고 예속시킨 다음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경성부의 행정구역을 개정하여 5부 8면제를 시행할 때 경성부 인창면 상월곡이라 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5부 8면제를 폐지하고 대신 8면 중의 일부는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하였는데 이때 상월곡동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상월곡리가 되어 변동없이 내려왔다. 그 뒤 1949년 대통령령 제 159호에 의해 성북구가 동대문구에서 분리 신설되자 상월곡동은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성북구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석관동
마을 동쪽에 있는 천장산의 한 맥이 검정돌을 꽂아 놓은 즉, 수수팥떡이나 경단을 꼬지에 꿰어 놓은 것같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돌곶이 마을'이라 부르다가 이 돌곶이 이름을 한자로 표기해서 석관이라는 동명이 붙여지게 된 것으로 전래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에 속했으며 영조 27년(1751)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동부 인창방 장위리계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갑오개혁(1894)때에는 한성부 동서(東署) 인창방(성외) 동소문외계 석관리였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경성부 인창면석관리라 했으며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동명과 구역을 임의대로 축소 병합시킬 때 석관동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석관리가 되어 변동없이 내려왔다. 1949년 대통령령 제 159호에 의해 성북구가 동대문구에서 분리 신설되자 석관동은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성북구에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북동
이곳은 산이 높고 골이 깊어서 도둑의 염려가 많으므로 그것을 미리 막기 위하여 어영청(御營廳)의 북둔(北屯)을 두었는데, 도성 북쪽에 북둔(北屯)이 있었다고 해서 성북이라 한 것이다. 성북동은 북사동(北寺洞)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옛부터 묵사(墨寺)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나 묵사(墨寺)는 절이나 암자일 수도 있고 관청에 쓰이는 먹을 제조하는묵사(墨寺)가 있었다는 설도 있다. 따라서 묵사동, 또는 묵시동이라고도 불리우는데 또 이곳은 조선 중기 이후 북둔(北屯)뿐 아니라 북창(北倉)이 두어졌기 때문에 북창동이라고도 했고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서는 북저동(北渚洞)이라고 칭했는데 동리 안에 복숭아나무를 심어 봄철이 되면 복숭아 꽃이 한창 피어났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때에는 한성부 동서(東署) 숭신방(성외) 동소문외계 성북동이 되었다. 1910년 일제는 우리의 민족혼이 깃든 고유지명을 사멸시키기 위해 한성부를 경성부로 고치고 이듬해인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5부 8면제를 실시하면서 성북동은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성북동이 되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하여 5부 8면제를 폐지하고 종래의 숭신방의 '숭(崇)'자와 인창방의 '인(仁)'자를 따서 숭인면을 만든 다음 성북동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가 되었다가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해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어 경성부 성북정이 되었다. 그 뒤 1943년 조선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하여 구제 실시에 따라 성북정이란 이름으로 동대문구에 속하였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대 성북동이 되어 동대문구에 속하였으며 1949년 대통령령 제 159호로 성북구가 신설됨에 따라 성북구에 속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암동
조선조 초기에 세조를 도와 공신이 된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재종형이며 정승의 아들이었던 문정공 한계희가 살았던 곳이다. 그는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나물에다 조석으로 끼니를 이었으나 그나마 과분하다 하여 양을 줄였다고 한다. 부원군이며 정승인 친척들이 양식을 보내주어도 받지 않으로 문중의 모임에서 그의 빈한한 생활이 거론되었고 대책을 세워주게 되었다. 이때 한명회의 제안으로 한 장의 문서를 작성하여 친척들이 연명으로 서명하였는데, 홍인문 밖의 고암(鼓岩; 지금의 고려대 구내에 있던 북바위)밑에 있는 논 열섬지기를 한계희에게 억지로 받게 하였다. 그는 이 논을 받았으나 논의 소출이 자기집 담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인근의 가장(家長)이 병든 집, 어려운 집 등에 모두 나누어주었다. 그의 이같은 자선사업은 유업으로 가문에 계승되어 인근 농가들이 편안히 살게 되었으므로, 이 장한 유업을 기리는 뜻에서 마을이름을 편안한 안(安)으로 바꾸어 안암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동부 숭신방(성외) 안암계였으며, 갑오개혁(1894)때에는 한성부 동서(東署) 숭신방(성외) 동문외계 원리 궁리 상리 중리였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성외 지역은 8면제를 시행하였는데 이때 안암동은 경성부 숭신면 안암리 부석리 궁리 원리였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성외의 많은 지역이 경기도 고양군으로 편입되었는데 이때 숭신면의 '숭(崇)'자와 인창면의 '인(仁)'자를 따서 숭인면으로 하여 안암동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였으며 1936년 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해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경성부 안암정이라 하여 일제식 동명으로 고쳤으며 1943년 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동대문구에 소속되었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동대문구 안암동이 되었으며 1949년 대통령령 제 159호에 의해 성북구가 신설됨에 따라 성북구관할이 되었으며 1963년 법률 제 1172호에 의해 안암동은 1ㆍ2ㆍ3ㆍ4ㆍ5가로 분동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장위동
동명의 유래는 미상으로 조선 시대 초에도 불리어 온 것을 보아 고려조 때 '명신(名臣)'이 이 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하고, 마을 뒤 장위산이 있으므로 이 산의 이름을 따서 장위동으로 부른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인창방(성외) 장위리계였으며 갑오개혁(1894)때 한성부 동서(東署) 인창방(성외) 동소문외계 장위리였다. 일제는 1910년 한성부를 경성부로 고친 다음,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경성부 인창면 장위리라 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구역을 임의대로 변경시켰는데 이때 장위동은 성밖 지역에 해당한다 하여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장위리가 되어 변동없이 내려왔다. 그 뒤 1949년 대통령령 제 159호에 의해 장위동은 경기도 고양군에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성북구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릉동
조선 태조 이성계의 제 2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貞陵)이 있음으로 해서 붙여진 동명. 신덕왕후의 정릉은 처음에는 지금의 중구 정동에 있었으나 태종 9년(1409)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정릉동의 처음 지명은 사을한리(沙乙閑里)였는데, 이는 우리말의 '살한이'를 한자음으로 옮긴 것이다. 사을한리(沙乙閑里)는 다시 사아리(沙阿里)로 약칭되기도 하였으며, 신덕왕후의 정릉이 이곳에 옮겨짐으로 하여 '능말' 즉 '정릉동'이라는 지명이 생긴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인창방(성외) 능동계였으며 갑오개혁(1894)때에는 한성부 동서(東署) 숭신방(성외) 동소문외계 소정릉동 손가정 청수동이었다. 그 뒤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경성부가 5부 8면제로 고쳐질 때 성밖 지역인 숭신방은 숭신면으로 되어 정릉동은 경성부 숭신면 대정릉동이라 하다가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하여 숭신면과 인창면의 각 일부를 합하여 숭인면으로 하였는데 이때 정릉동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가 되어 변동없이 내려왔다. 그 뒤 1949년 대통령령 제 159호에 의해 성북구가 신설됨에 따라 정릉동은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성북구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종암동
고려대학교 뒷산에 북(고; 鼓)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한자로 '종암(鐘岩)' 또는 '고암(鼓岩)'이라고 부른 데서 연유된 동명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때에는 한성부 동서(東署) 인창방(성외) 동문외계 대종암 소종암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경성부의 행정조직이 5부 8면제로 고쳐질 때 종암동은 경성부 숭신면 대종암ㆍ소종암이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하여 경성부 구역이 축소되었는데 이때 종암동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종암리였으며 그 뒤 1936년 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해 경성부 구역이 대폭 확장됨에 따라 이때 종암동은 경성부에 편입되어 일제식 동명인 경성부 종암정이라 했으며 1943년 구제 실시에 따라 동대문구에 속하였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모두 없앨 때 종암동으로 하여 동대문구에 속하였으며 1949년 대통령령 제 159호에 의해 성북구가 신설되자 종암동은 성북구에 소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월곡동
하월곡 3ㆍ4동의 산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기 때문에 월곡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설과, 조선 후기 미아삼거리에 신근솔이라는 솔밭에 주막이 밀집하여 있었는데 장위동 주변 도살장에 소를 팔러 오는 소장사들이 이곳에 달밤에 도착하여 묵었다가 잔월(殘月) 아침에 흥정을 했기 때문에 월곡이라는 동명이 생겼다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영조) 한성부 동부 인창방 미아리계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 때에는 한성부 동서(東署) 인창방(성외) 동소문외계 월곡하리였다. 1910년 한성부를 경성부로 고치고,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경성부 인창면 하월곡이라 하다가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해 동명과 구역을 자의로 병합ㆍ축소시킬 때 월곡리는 성밖 지역에 해당한다 하여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월곡리로 하여 변동없이 내려왔다. 그 뒤 1949년 대통령령 제 159호에 의해 성북구가 신설되자 하월곡동이 되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고 성북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