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평 약사 ]
석기시대부터 일부 지역에서 혈연을 같이 하는 씨족끼리 집단을 이루어 취락생활을 했던 은평구 지역은 서울의 일부로써 백제 때에는 위례성, 신라시대에는 신주, 통일신라시대에는 한산주로 부르다가 경덕왕 7년(757년)에 한주로 고쳤다. 그리고 서울 지방에는 한양군을 설치했는데 서울이라는 이름의 하나인 한양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고려시대에는 한양군을 양주라 고치고 문종 21년(1087년)에 양주를 남경으로 승격시켜 서경(평양), 동경(경주)과 더불어 3소경이 되어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습니다. 이후 충렬왕 34년(1308년)에 한양부로 개칭하였습니다.
조선 태조 3년(1394년)에 한양부로 도읍, 한성부로 고치고 서울지역은 5부 52방으로 개편했는데, 지금의 구(區)에 해당하는 5부(동, 서, 남, 북, 중)중 은평구 지역은 북부의 성외인 연은방, 상평방 지역에 해당되었으며 은평은 이 두 지명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한일합방이후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뀌고 성안(방)과 밖(면)을 구분, 5부 35방 8면제(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만들었으며, 1913년 12월 총독부령 제111호로 각 도의 위치 및 관할지역과 부(府), 군(郡)의 명칭이 결정되고 이듬해 4월부터 실시되었는데 연은방 상평방 지역에 은평면(36개 동, 리 관할)이 설치(경기도령 3호)되었습니다.
이때 경성부의 관할지역이 대폭 축소되어 은평면 지역이 경기도 고양군으로 떨어져나갔고, 서울시로 편입된 것은 해방 이후인 1949년 8월 13일(대통령령 제159호)에야 이루어졌습니다.
그간의 서울지방의 행정구역 변천을 보면 1936년 2월 14일 조선 총독부령 제8호로 경성부의 구역을 확장, 변경했는데 은평면의 일부인 5개리(홍제외리, 홍제내리, 부암리, 홍지리, 신영리)가 설치되고 이어 1940년 7월에는 서부출장소를 신설,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43년 6월 경성부령 제163호로 출장소를 폐지, 구(區)제를 실시했는데 용산출장소를 용산구, 동부출장소를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서부출장소를 서대문구로, 영등포출장소를 영등포구로 하고 4대문안에 종로구와 중구가 설치되어 7구제가 시행된 다음에 10월에는 연희면의 일부를 경성부로 편입하면서 서대문구, 용산구의 일부를 분할, 마포구가 신설되어 8개구로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해방후 1946년 9월에 경성부가 서울시로 되었고 경기도 관할에서 분리, 서울특별시로 승격(서울특별시 군정법령 제 106호)되었으며 1949년 8월 고양군 은평면 11개리, 연희면 7개리가 서대문구에 편입, 이 구역을 관할할 은평출장소를 설치(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61호)하면서 비로소 은평구 지역이 서울시로 편입되었습니다.
1973년 3월 12일 법률 제2569호로 그해 7월 1일을 기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관내 구파발리와 진관내, 외리를 서울시로 편입하여 현재의 은평구 지역으로 관할하게 되었으며 1979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로 서대문구에서 분구되어 출장소를 폐지하고 은평구(15개동 : 녹번, 불광1, 불광2, 갈현, 구산, 대조, 응암1, 응암2, 응암3, 역촌, 신사, 증산, 수색, 진관내, 진관외)로 되었다. 1988년 5월 1일 지방자치제를 실시, 희망과 신뢰속에 사랑을 나누는 주민들이 살고 있는 전원도시 은평구(1989년 9월 1일 이후 행정동20개동, 법정동 13개동)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갈현동
구산동
구파발동
구파발이란 지명은 조선중기부터 공문서를 전달하기 위한 파발역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지역은 옛부터 경의가도의 덕수원이란 국립여관외에 주막과 대장간이 많았다.
녹번동
녹번이란 지명은 녹번이 고개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곳에서 홍제동으로 가려면 이 고개를 넘게 되는데 이 고개에서 약용으로 쓰이는 자연동인 <산골>이 나오므로 녹반현으로 부르게 되었다. 녹반현은 변음되어 녹번이 고개로 칭하게 되었는데 이 고개가 워낙 높고 험한데다가 숲이 우거져 혼자 넘어 다니기를 꺼렸다고 한다.
대조동
불광동
불광이라는 지명은 글자 그대로 이 근처에 바위와 대소사찰이 많아 부처의 서광이 서려있다고 해서 이름지어진 것이다.
수색동
지역적으로 한강 하류에 위치한 수색동은 예로부터 물과 깊은 인연이 있던 곳으로 물치, 무르치라는 우리말에서 음이 변하고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수색, 수생리로 표기하였다.
신사동
역촌동
역촌동은 조선조 신하들이 장거리 여행시 말이 쉬어 갈 수 있는 역(延曙驛)이 있어 역말이라 불리어 여기서 역촌이 유래되었고, 옛 지명으로는 마방촌, 토정리라 불리었다.
응암동
마을 뒤 백련산 기슭에 있는 커다란 바위의 생김새가 마치 매가 앉아 있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매바위골이라 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이 곳에서 사냥을 하기 위해 장막을 치고 포수들이 기거하던 곳이 여러 곳 있었으며 궁중에서 나와 사냥터로 삼았던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증산동
진관내동
진관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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