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수동
하수동의 동명은 물가의 마을중 아랫목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것이며 일명 "농바우마을"이라고 부른 다. 그 까닭은 하수동 152번지 2호에 농처럼 생긴 큰바위가 강가에 우뚝 솟아 있어서 "농바우"또는 "통 바우"라고 불렀기 때문이 라하며, 와우산을 소에 비유할 때, 농바우는 여물통에 비유된다고 하는데 현재 는 강변도로를 건너야만 이 바위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하수동은 조선 영 조 27년(1751년)에 반포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처음으로 서부서강방 수일리계로 나타나있고, 고종 4 년(1868)의 육전조례에 서강방 하수일계로 나타나는데 상수일리계로 분리된 것은 언제쯤인지 알 수가 없다. 한일합방후 경성부의 서강면 하수일리가 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에 편입되었다가 1936년 다시 경성부에 속하면서 하수 일정으로, 해방후 1946년 10월 1일 일제식동명 일소 방침에 따라 마포구 하수동으로 개칭되었다가, 1989년 6월 1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조례 제84호 :동명칭 및 구역획정" 에 따라 폐지되어 지금은 하수동이란 명칭은 사용되지 않고 있다.
구수동은 구수철리를 경성부로 편입하면서 구수정이라 하던 것을 광복 후 구수동으로 동명을 개정한데서 비롯된다. 구수동은 조선 초에 한성부 영역이 되지 못했으나 1751년에 만든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처음으로 한성부 관할구역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곧 한성부 서부 서강방 성외 구수철리계였으며 1894년 갑오개혁때 한성부 서서 서가앙 성외 구수철리계 구수철리였다.
1910년 10월1일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뀌면서 경기도 관할구역이 되었고 1911년 4월1일에는 경기도령 제3호에 따라 경성부 서강면 구수철리가 되었다. 1914년 4월1일 경기도고시 제7호로 경기도 용강면 구수철리로 되었는데 1936년 4월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로 경성부 관할구역이 확장되면서 구수정이 되고 동일자로 설치한 사부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43년 6월10일 조선총독부령 제350호로 마포구 구수정이 되었고 1946년 10월1일 일제식 동명의 우리말 개정원칙에 따라 마포구 구수동이 되었다.
구수동은 신수동사무소의 행정관할을 받고 있는데 구수동 21번지 한국구화초등학교 자리에는 절이 있었다 하여 절터라 불렀다. 신수동과의 경계지점은 홍현(紅峴)·붉은고개 등으로 불렀다. 본래 붉은 색은 중국에서 사용하는 색상인데 임진왜란 때 원병으로 온 명나라군이 이곳의 언덕 흙이 붉은색인 것을 보고 소국(小國)이면서 천자의 땅에나 있는 홍현이 있으니 이는 불경(不敬)한 일이라며 원군을 다시 회군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왜군의 진격과 승전기세에 눌린 명군이 비록 도와주러 오기는 했으나 전쟁에 나서는 것을 꺼려 내뱉은 말이었다.
서울을 점령한 왜군은 홍현에 적토마가 난다는 속설을 믿고 일대로 와서 며칠을 기다렸으나 말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왜군이 마을을 짓밟고 산과 들을 불태워서 한동안은 아무도 거주하지 못할만큼 황폐한 곳이 되어 버렸으므로 아무도 살 수 없다는 뜻의 홍현이 되었다.
임오군란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는데 동학혁명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들어온 일본군과 청국병이 또다시 구수동의 홍현을 놓고 자리 다툼을 하였다. 곧 조선에서의 실권을 잡기 위해서는 명당에 주둔해야 하는데 홍현은 군사상의 명당에 해당되기 때문에 서로 먼저 차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일본군이 이 지점을 먼저 차지하여 나중의 청일전쟁에서도 승리를 하게 되었는데 청나라 오장경(吳長慶)은 명동의 주둔지보다 이곳을 먼저 차지해야 했는데 궁궐과의 거리만 계산하여 명동을 선점하여 결국 일본군에 패했다며 억울해 하였다
하중동
하중동의 동명은 이곳의 옛지명인 하중리(賀中里)에서부터 비롯된다.하중동은 우리나라 근세사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곧 1866년의 병인박해 이후 처음으로 프랑스함대가 마포강 앞까지 들어와서 수심을 측량하며 주변의 정세를 파악해 간 곳인데 조선정부는 가만히 앉아서 정탐을 당한 형상을 했던 상황이었다. 1866년에 내려진 흥선대원군의 전국적인 천주교금압령에 따라 교도에 대한 박해와 학살이 자행되었는데 이것이 병인박해이다. 이때 천주교도 12만명이 체포되고 약 8천명이 사형되었는데 이 가운데는 조선에 들어와 포교활동을 하고 있던 프랑스선교사 12명 가운데 9명도 처형당했다. 체포되지 않은 리델, 깔레, 페롱에 대해서도 5월1일자로 정부에서 명령을 내려 그들의 흔적 수사에 착수하는 동시에 국외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요로와 국경·해안선을 차단하여 철저하게 감시했다.
정부의 심혈을 기울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리델이 탈출에 성공하여 천진에 있던 프랑스 아시아함대사령관인 로즈제독에게 그간의 조선사정을 보고하였고 선교사박해를 이유로 조선원정을 단행키로 결정하고 원정군을 편성, 프랑스함대의 수로개척을 위한 한강본류의 탐색작업이 시작됨에 따라 서울근처의 산천을 세밀하게 탐측하고 지세를 제작하는 등의 이유로 서울시민의 식량과 땔감 등 생활필수품을 조달하는 주요보급로가 한강을 가로막고 있는 프랑스함대 때문에 도성의 인심은 흉흉해질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함대가 하중동 앞바다에서 1박을 하며 근처의 탐측을 하여 그린 것이 절두산성당에 보관되어 있는 「강화해협수심측량도」이다.
이 수심측량도에 의하면 한강하류의 수류와 장애물 정도,수심,강폭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40여년이 지난후 일제치하에 들어갔을 때 일본이 작성한 한강수심도도 이를 근간으로 하였고 1950년 6·25동란으로 인한 인천상륙작전을 행할 때도 바로 이 수심도를 응용하였다. 이처럼 상세한 한강수심도가 바로 하중동 앞바다에서 작성되었으므로 하중동과 외세와의 관계는 불가분한 것이었다. 1866년 8월 19일 이들이 김포앞을 경유하여 왔던 길을 되돌아 가고 난 후 조선정부에서는 서울의 코앞까지 왔던 이 사건에 대해 담당을 문책하는 등 사후약방문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 근세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하중동은 강변에 위치한데다가 잦은 한강범람 등으로 인해 지역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곳이다. 오히려 그 앞의 밤섬에서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하중동의 생활터전이 낮았던 이유는 현석동까지 오던 한강이 하중동 상수동부분에 오면 감돌며 흐르기 때문에 비교적 물살이 세고 급하게 흘렀기 때문이다. 이에 수심도 깊었기 때문에 어류의 서식처가 되지 못하였다. 1920년 7월 한강 수위는 9.53m에 까지 이르러 마포 일대에 강물이 범람하여 큰 피해를 입었으며 1925년 을축년 홍수때 또 다시 강물이 넘쳐 침수된 마포 하중동일대는 비참할 정도였다 . 이에 강물의 범람에 대응하여 서울 주변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 한강연안의 제방공사였고 서울 동서간 교통연결정책은 바로 제방공사를 보완한 강변도로의 건설이었다. 이 결과 하중동은 홍수피해로부터 어느정도 안심할 수가 있었다. 여기에다 1968년 2월 10일에는 한강유속에 장애가 되는 밤섬을 폭파하여 하중동 앞 한강은 크게 변모하였다.
합정동
합정동에는 조개우물이 있었다 하여 동명이 유래되었다. 합정동의 유래가 되는 조개우물은 지금의 절두산순교기념관이 세워진 근방인데 처형장이던 이곳에서 망나니들이 사형도구로 쓰는 칼을 갈고 물을 품기 위해서 팠던 우물이다. 우물바닥에 조개껍질이 많아서 조개우물로도 불렀는데 이 우물은 천주교인을 한참 탄압할 무렵 이곳에서도 고문을 자행할 때 사용되었다. 천주교인의 물고문용 우물이라 할 수 있는데 강변도로의 건설로 없어졌다.
합정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곳은 서울 외인묘지와 양화대교 진입 인터체인지 및 한강시민공원과 절두산순교기념관이라 할 수 있다. 양화대교가 놓여진 곳은 조선시대 서울을 출입하던 나루터인데 「동국여지비고」권2 산천조에 의하면 "양화도는 서강나루에 있는데 처음에는 나루지기인 도승을 두었으나 후에 별장을 두었다"고 하였고 관방조에는 "양화진은 1754년에 설치한 것으로 어영청 소속으로 별장이 있고 아장이 200명이었다"고 되어있다. 그외 각종 문헌에도 양화나루에는 나루지기가 있으며 방어를 위한 진(鎭)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곧 고려 이래로 양천·강화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 양화나루를 건너야 했으므로 영조 이후에는 송파진·한강진과 함께 서울 3진으로 요충지였다. 잠두봉 서쪽의 양화대교 동쪽지점인 양화나루를 큰나루라 하였으며 맞은편은 안양천이 유입되어 합류되는 지점을 연결하였다. 이 나루는 바다와 통해 있으므로 경상·전라·충청·경기도의 공세와 미곡을 서강의 광흥창까지 운반하는 조운(漕運)전용항구였다.
조선초에는 용산강을 한강 으뜸의 항구로 쳤으나 수위가 낮아지면서 하류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1591년의 기록이나 1636년의 기록에서도 수위가 얕아져 양화나루 이상은 배가 다닐 수 없다고 하였다.
한편 양화나루 근방은 경치가 매우 뛰어난 곳이었다. 절두산성당이라 부르는 곳은 마치 누에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어서 잠두봉이라는 표현을 하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정경은 그림과도 같았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용산서쪽에 마포·토정·농암 등의 강마을이 있어 모두 서해와 통하므로 8도의 배가 모여 들게 되어서 성내외 공후 귀족들이 모두 이곳에 정자를 짓고 놀이와 잔치장소로 삼았다"고 하였다. 한강진에서 시작된 뱃놀이의 마지막 지점이 되는 잠두봉 아래의 양화나루에 대해서 명나라 사신 예겸이 "도성에서 서남으로 15리쯤 가면 나루터가 있어 양화도라 하는데 대개 각 도에서 오는 군량이 와서 닿는 곳이다. 나루 어구에 푸른 돌이 수리나 되는 듯한 넓은 산이 물가에 벽처럼 섰는데 푸르고 늙은 소나무가 많아서 마치 높은 관을 쓰고 칼을 든 이가 섞여 서서 서로 마주한 것 같다. 여기에 올라가면 한없이 조망이 좋았기에 걸어서 돌깔린 산마루에 올라가 소나무를 의지하여 모두 나무를 엮어 만든 난간에 기대고 바라보니 멀리 가까이 있는 돛단배들이 그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언덕 저 멀리에 기름진 논밭이 많고 촌가가 총총히 있다"는 표현을 한 것을 보아 이곳의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경치로 되어있던 잠두봉 아래 모래밭은 조선 후기에 가면 일대변혁이 이루어지게 된다. 곧 앞서도 설명한 바 있듯이 천주교인의 대량 처형장소로 바뀌어지고 말았던 것으로 후일 절두산천주교성지라 불리는 곳이다. 합정동 96-1번지에 세워진 천주교 절두산순교기념관 자리에서는 병인박해 때 프랑스신부 9명과 남종삼바오르 등이 이곳에서 처형당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하면서부터 잠두봉은 절두산이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강뚝에서는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김옥균의 시체가 효수된 일도 있었다. 합정동 144번지에는 외인묘지가 있다. 양화진 진대(鎭臺)의 뒷동산에 해당되는데 1885년 임금으로부터 땅을 하사받아 다음해부터 묘를 쓰기 시작해서 약 500기의 묘가 있다. 입구 가까이 있는 것은 대한매일신보사장 배설의 묘와 우리나라 종교계·교육계에 공이 많은 언더우드부부와 그의 친묘, 이화여대에 공이 많은 아펜셀러·앨리스·베백카를 비롯해서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설립자 더글라스·비·에비슨의 묘도 있다. 또한 1991년 4월 17일에는 대한결핵협회장으로 한국결핵사업의 선구자 셔우드 홀이 그의 유언에 따라 이곳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
「망원정지」
망원정은1424년 효령대군이 지은 별장으로 1925년 큰 홍수로 유실되었다가 1989년 복원된 정자로 예전에는 '희우정'으로 불리웠다.(서울시문화재 기념물 제9호)
「장두봉 절두산 성지」
조선후기 병인박해 때 프랑스 신부 등과 많은 천주교신자가 처형당한 곳으로 순교 기념관이 잇다.(구가지정 문화재 제399호)
현석동
현석동의 동명은 이곳에 검은돌이 많이 생산된다하여 현석리라 부르던 것에서 비롯된다. 현석동의 유래는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전해진다. 첫째는 농암(籠岩)이라 부르던 이곳에 조선 숙종때 문신인 현석 박세채(朴世采 : 1631~1695)가 소동루를 지어 살고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당쟁에 가담했으나 황극탕평설(皇極湯平說)을 주장하여 당쟁의 중재에도 힘썼던 박세채는 당대의 유종(儒宗)으로 예학에도 밝았는데 그의 죽음을 전해 들은 숙종도 애도하면서 도승지를 보내 조상한 일도 있다. 그가 살았던 소동루는 177번지 강변도로 옆 언덕에 있었다. 중국의 동주에 비해 작은 곳이라는 뜻으로 붙인 소동루는 박세채가 말년을 보내며 집필을 했던 곳인데 강위로 나는 갈매기와 강상에 유유히 떠있는 황포돛배의 매력을 뿌리칠 수 없어 언제나 강쪽으로 나있는 문을 열어 두고 지냈다.
그가 죽은 후 한때 소동루는 허물어지기도 했는데 안동김씨의 세도가 강화될 무렵에는 김병근의 첩인 나합이 이 별장을 갖고 싶어하자 박세채의 후손들로부터 거의 뺏다시피해서 나합에게 준 일도 있다. 나합은 이곳에서 거주하면서 안동김씨 세력이 극에 도달할 수 있도록 날마다 주연을 베풀어주었다. 또 방생(放生)이라는 명목으로 수만가마로 지은 흰쌀밥을 소동루앞 한강에 뿌려주었는데 흉년으로 기근을 면치못하고 있던 소동루 주변의 사람들은 강변에 묶어둔 나합의 배 밑에 숨어 들었다가 배가 출발하면 함께 헤엄쳐 가서 가마니채로 던진 밥을 담아온 일도 많이 있었다. 이 소동루는 다시 대원군의 소유가 되었는데 대원군은 이곳 별장에서 지내지 않고 이따금씩 이곳으로 와서 강화교동으로 유배된 손자 생각만 하고 다시 공덕리로 돌아가곤 하였다.
현석동이 된 유래의 두 번째는 현(玄)자에 있는데 "검을" "검은"의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검은돌이 있는 부락이라는 명칭으로 현석이라 했으나 사실은 "현"이라는 의미는 노자의 「도덕경」에 의하면 '검은 계곡의 귀신으로 무한한 생산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한다. 곧 음양의 조화에 맞추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생산을 하는 곳이라는 뜻인데 밤섬과 노고산에서 내려온 능선을 타고 강가에 자리한 현석동은 만(灣)의 성격을 띄우고 있어서 어획고가 비교적 높은 곳이었다. 게다가 구릉지를 이용한 농업의 적격지였으므로 생산은 무한하게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곳이기 때문에 앞서 설명한 것처럼 "현석"을 검은돌이 많이 나는 곳이라는 단면적인 해석보다는 땅이 비옥하고 자원이 풍부한 마을이라는 해석이 더욱 적합할 것이다. 조선 후기에 나타난 지명인 흑석(黑石)은 곧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세 번째로 현석동의 유래에 대해서는 1929년 일본 동경에서 발간된 「조선강안에 전해오는 이야기」이라는 책에 게재되어 있다. 곧 이 책에 의하면 원래 조선에서는 고려 때 사공으로 유명한 손돌이 있었는데 몽고군이 침입해오자 임금과 귀족들을 태우고 강화로 피난을 갔으나 겨울 북서풍 때문에 방향을 잘못 잡아 소용돌이치는 강 한가운데서 노를 놓치는 바람에 같이 탄 다른 귀족이 왕을 죽이려는 속셈이라 단정하고 배위에서 처형을 하였다. 그러나 뒤쫓아오는 몽고군을 유인하고 안전하게 배를 저어 임금을 피신시키려 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서 이를 후회하며 죽은 사공을 잘 장사지내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이 손돌의 넋이 약 500년이 지난 후 이곳에 살던 현석이라는 사공에게 씌워졌는데 이 무렵은 청나라가 침입하여 조선이 매우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을 무렵이었다. 남한산성쪽으로 피신하려는 왕과 왕비, 왕자, 대신을 배에 태운 사공 현석은 닻을 올리고 노를 저어 강가운데쯤 갔을 때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고 조용하게 흐르던 강물이 소용돌이 치기 시작하였다. 멀리보니 다른 지역은 청명하기 그지없는데 유독 뱃길만 날씨가 험상궃자 배안에 탄 대신 가운데 한사람이 '이는 사공을 잘못 선정해 배를 젓게 한 것이니 당장에 저 사공을 산제물로 하여 용왕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날씨가 제대로 걷혀질 것이다'며 주위에 동조를 구하였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 말에 찬성하면서 마침내 제사준비를 끝냈고 결박당한 현석은 강물 속에 던져졌는데 신기하게도 날씨가 개이면서 사공없는 배가 맞은편 강가에 가 닿았다.
배에서 내린 일행들이 현석리쪽을 바라보니 현석의 노모와 아내가 강가에서 땅을 치며 통곡을 했는데 이 때문에 그의 넋을 위로하는 사당을 차리고 1년에 한번씩 제사를 지내게 해주었다. 이것이 현석동 부군당(府君堂)이 만들어진 배경인데 현석동의 부근당에서는 반드시 사공 현석의 제사를 지내는데 조선말로 돌은 곧 석(石)을 가르키는 것이므로 손돌의 돌과 현석의 석이 같은 뜻이 있고 손은 지방에 따라서 선이라 발음하는 곳도 있으므로 곧 손돌은 선돌로 다시 현석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1929년도에 발행된 이 책은 설화 내용의 조사기간을 그보다 먼저 잡고 있으므로 어느 정도 타당성도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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