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광진구 지명 유래
조회 : 426 이름 : 불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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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구라는 명칭은 지금의 광장동의 광진교 주변의 강폭이 넓은 곳에 나루터가 있다하여 "너븐나루"라고도 불리워졌던 "광나루"에서 유래되었다.

광진구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로 이 곳이 우리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각축을 벌이던 삼국시대이다. 고구려의 장수왕이 390년에 한강 남쪽에 자리한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을 함락시킨 이래 신라 무열왕이 675년에 한반도를 통일할 때까지인 260여년 동안 이 곳은 군사적 요충지로서 삼국이 국운을 걸고 싸움을 벌이던 무대였다.

고려 태조 때부터 정종때까지는 양주로,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 충선왕 이후 고려말까지는 한양부로 불리웠으며 당시 각 지방은 호족세력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양주지방은 뚜렷한 호족세력이 나타나지 않던 곳으로 고려 태조 왕건의 공격에 의해 점령되어 고려왕조의 직할지가 되었다.

그 후 조선시대 광진구 지역은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에 속하였는데 이 곳은 국가의 군사용 말을 기르고 훈련하는 마장이 넓게 자리잡고 있어 임금이 수시로 나와 군사훈련을 참관하기도 하였다.

중곡동(中谷洞)

아차산 서쪽 기슭에 위치하고, 동명의 유래는 위치가 능동과 면목동 중간에 있으므로, 간뎃말 또는 한자음으로 중곡리라 하였음.

능동(陵洞)

어린이대공원이 자리잡고 있으며,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비, 순명황후 민씨 유릉이 있었으므로 능말, 능리라 하였고, 마장의 안쪽에 있어 안말, 장안말, 또는 한자음으로 내리(內里), 장내리(場內里라) 하였음.

구의동(九宜洞)

아차산 기슭에서 한강변에 이르는 긴 지형으로 자연촌락 구정도(九井洞)의 九자와 산의동(山宜洞)의 宜자를 따서 구의리라 하던 것이 구의동이 됨.

광장동(廣壯洞)

아차산 줄기 남쪽 한강변에 위치하며, 광나루는 강폭이 넓은 나루를 일컬으며 조선시대 자연촌락 광장리(일명 광나루)의 廣자와 장의동(壯 義洞)의 壯자를 따서 광장동이 됨.

자양동(紫陽洞)

잠실대교 북쪽 좌우편 한강변에 위치하고 조선시대 국가에서 말 1,000 마리를 기르면 용마(龍馬)가 난다하여 자마(雌馬) 즉, 암말을 길렀기 때문에 자마장이라 칭하였고 동명을 자마장리라 부르다가 자양동으로 전음(轉音)됨.

노유동(老遊洞)

제방이 없을 때 잔디밭인 이 일대가 가을에 누렇게 변하여, 누런 잔디 산이라 불리다가 누런산으로 다시 노룬산으로 전음됨.
풍류객이 늙어감을 서러워하지 않고 즐기는 곳이라 어느 때부터인가 노유산으로 전하여짐.

화양동(華陽洞)

조선시대 화양정이 세워져 있어서 유래. 일설에는 조선초 왕위를 빼앗 긴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로 귀양갈 때 이곳에서 송씨 부인과 이별하면서 회행하기를 기원했다 하여 회행리라고 호칭했다는 설도 있으며 화양정을 회행정(回行亭)이라고도 했다.

모진동(毛陳洞)

건국대학교가 대부분을 점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전곳평의 양마장(養馬場)지역으로 가끔 방목된 말이 실족하여 건국대학교 정문근처 수렁에 빠져 죽으면 이곳 여인들이 말을 건져내어 그 고기를 나누어 먹었다하여 인근 주민들이 이 여인들을 모진여인이라 부르던 것이 모진동네로 바뀌었다는 유래로 모진동이라 부르게 됨.


작성 날짜 : 2005-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