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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에 기상, 6시30분 출근, 새벽 사내 영어 듣기반 강좌 수강, 점심 막간을 이용한 1 대 1 전화 원어민 회화, 저녁 사내 영어 프리젠테이션 강좌 수강. 그리고 토요일은 시내 학원에서 영화로 배우는 영어 청취력 향상 프로그램과 토익 고득점반 수강. 일요일에는 온라인 영어 듣기 평가와 비즈니스 영어회화 공부.
A그룹 연구개발부서 이모(39) 과장의 일주일 영어공부 스케줄이다. 쉴 틈도 없이 빡빡하게 짜여진 일정이지만 이 과장은 그래도 여전히 뭔가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어 노심초사다. “부서에 저를 포함해 과장이 다섯 명인데 나머지 네 명이 외국 유학을 다녀왔거나 살다온 사람이에요.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사람들 영어 따라가려면 힘들죠. 업무 능력 비슷하면 결국 영어실력에서 진급 여부가 판가름날 텐데 걱정 안할 수 있나요.”
이 과장은 다른 사람이 업무에 신경쓸 동안 자기는 영어공부에 시간을 뺏겨 이래저래 손해가 막심하다고 한숨을 쉰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영어실력은 늘 제자리걸음. 외국인과 전화를 하다보면 이해 정도가 70% 정도밖에 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이메일로 보내주겠다고 답하고 끊는다. 요즘 들어 ‘젊었을 때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외국 유학 다녀올 걸’ 하는 후회가 밀려든다.
과장 승진을 앞두고 있는 B기업의 연구원 김모(35)씨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집이 있는 수원에서 새벽 5시반에 나와 아침에 제일 먼저 들르는 곳은 강남에 있는 영어학원. 영어공부를 마치고 봉천동에 있는 회사에 도착해 아내가 싸준 아침 도시락을 먹으며 업무준비를 하다보면 피곤이 몰려온다.
“지금도 해외법인 엔지니어들과 대화가 안되면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외국인들과 전화로 대화하고 나면 솔직히 절반 이상은 이해 못해요. 영어 잘하는 후배들 보면 민망하죠. 게다가 회사에서 2008년까지 모든 문서를 영문화하기로 하면서 영어문서 작성할 일도 늘어나서 외국회사에 다니는 건지 분간이 안갈 때도 있어요.” 국내 유수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김씨는 해외유학파 박사들이 계속 스카우트되고 있어 이대로 가다간 학력에서조차 밀려날 판이라는 생각까지 든다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직장인 사이에서 영어는 ‘생존의 필수조건’이 돼 가고 있다. 글로벌 비즈니스를 펼치는 기업환경의 변화로 대기업은 물론이고 작은 중소기업까지 해외 바이어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하거나 영어회의 하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다자통화 시스템인 컨퍼런스콜로 세계 각국 사람이 한번에 전화 앞에 모여 회의를 하는 것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환경의 변화에 발맞춰 기업들은 사원의 영어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GM대우 인재육성팀의 김진환 차장은 “현재 영어교육 전문업체에 위탁해 새벽, 점심, 저녁 시간대별로 강좌를 마련해 놓았고 팀장급 교육과 팀 내에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 몇몇을 뽑아 외국인 임원과의 의사소통을 돕는 잉글리시 코디네이터 제도도 마련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내교육이라고 만만히 볼 수 없다. 전액 무료교육이지만 강좌를 수료하지 못하면 수강비를 개인 부담으로 돌린다. 김 차장은 “전에는 평사원이 기획안 올리면 여러 단계를 거쳐 결재를 받았는데 지금은 외국인 임원이 기획안을 보고 바로 해당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설명을 요구하는 식이라 지위고하 막론하고 영어교육을 늦출 수가 없다”며 기업의 달라진 환경을 설명한다.
외국계 기업의 경우는 두말 할 나위 없다. 스위스에 본사를 두고 있는 한국노바티스는 사원교육은 물론 매니저급 교육과 영어 프리젠테이션 단기 코스까지 다양한 영어강좌를 개설해놓고 있다. 안병희 홍보이사는 “회의에 외국인 임원이 참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화회의며 각종 워크숍에 내부 문서까지 상당 부분이 영어로 이루어지고 있다”며 “영어실력이 부족하면 회의 때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고 예리하게 피력하기 어려워 요즘은 사원채용시 영어능력을 중점적으로 고려한다”고 했다.
C그룹의 연구부서에 근무하는 최모(여·32)씨는 “사원들 사이에서 저처럼 국내 대학의 석사학위를 받으면 복사만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돈다”며 “과장 승진은 꿈도 못꾸고 일찌감치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 한다”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프로젝트를 맡아 같이 일을 해도 영어회의에서 발표하는 것은 항상 외국 유학 다녀온 동료 직원이라 이미 상사들 사이에서 자신은 눈 밖에 난 것 같은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영어공부로 한시가 급한 직장인들은 저녁 늦은 시간, 집 대신 학원을 찾는다. 강남에 있는 정철어학원 김민성 마케팅 팀장은 “11월은 원래 학원이 비수기인데 이번 달 저녁시간 수강생이 지난 달보다 세 배나 더 증가했다”며 “20대 후반부터 40대 중후반까지 영어교육 받으려는 직장인의 열기가 대단하다”고 말했다.
실제 평일 저녁 8시 무렵, 이 학원은 늦은 수업을 듣기 위해 몰려든 직장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학원에서 만난 김모(여·31)씨는 외국계 기업으로 이직하기 위해 영어공부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외국계 기업에 근무하다가 벤처기업으로 와보니 근로조건이며 대우나 여성 복지 등에서 외국계 기업이 훨씬 월등해요. 기회가 닿으면 다시 외국계 기업으로 옮기려고요. 제가 국제공인회계사 자격증도 있는데 전 직장에서 영어가 미숙하니까 한계가 빤히 보이더군요. 부장급 이상이 모두 외국인이라 그들과 의사소통도 제대로 못하면서 자격증만 있으면 뭐하겠어요. 사회에서 롱런하려면 이제는 영어실력이 필수인 것 같아요.” 아는 이들 중에는 서른을 넘긴 나이에도 어학연수를 떠나는 이들이 있을 정도라며 김씨는 “공교육이 제발 영어교육에 대한 문제점을 해소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중견기업 전자기술관리 업무를 담당하는 임원인 전모(46)씨는 벌써 세 달째 새벽 6시20분 수업과 저녁 8시 수업을 매일 빠지지 않고 듣고 있다. “몇 년 전에 외국 출장을 갔다가 영어 때문에 낭패를 본 적이 있어요. 교육차 간 거라 통역을 대동하지 않았는데 그쪽 업체들에서 갑자기 프리젠테이션을 요청한 거예요. 프로그램 만들어 겨우 준비는 했지만 영어실력이 짧다보니 보디랭귀지로 외국인 앞에서 설명을 하고 나서 미리 영어공부 해놓지 않은 걸 참 많이 후회했어요.”
전씨는 요즘 저녁 늦게 집에 들어가면 아이들과 몇 마디 대화도 나눠보지 못하고 바로 잠자리에 든다. 그러나 힘든 것은 뒷전이고 자신의 자녀에게도 영어공부 열심히 하라고 당부할 뿐이다. 그는 불과 1~2년만 지나도 영어의 중요성이 지금의 몇 배 이상 강조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영어가 계급’이라는 말이 빈말이 아니라고 느끼고 있다.
이선정 자유기고가(sjlgh01@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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