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저기요, 지하철 좀 못가게 잡아줄 수 없어요? 중요한 걸 두고 내려서 그래요!” 서울 지하철 6호선 태릉입구역 유실물센터로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유실물센터 직원은 물건을 두고 내린 역 이름과 열차에서 내린 시각을 물어보았다. 열차 시각표를 보면 지하철의 현재 위치를 대충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하철의 위치를 파악한다고 해서 일이 다 끝나는 것은 아니다. 몇 번째 칸에 탔는지를 모른다면 짧은 정차 시간 동안 물건을 찾아내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승객도 많이 있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지하철을 잡아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강아지 옷을 두고 내렸다는 그 승객은 지하철에서 내린 다음 꽤 시간이 경과한 터라 양심적인 승객이 유실물센터에 물건을 접수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서울 지하철에서 발생하는 유실물을 처리하는 유실물센터는 4곳. 1~4호선을 운영하는 서울지하철공사의 시청역(1·2호선에서 발생하는 유실물)과 충무로역(3·4호선), 5~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도시철도공사의 왕십리역(5·8호선)과 태릉입구역(6·7호선)에 각각 유실물센터가 마련돼 있다. 단 서울지하철공사와 한국철도공사가 함께 운영하고 있는 1호선의 경우 서울역에서 청량리역 사이를 제외한 구간에서 발생하는 유실물은 구로역에 마련되어 있는 한국철도공사 관할 유실물센터에서 보관한다.
“전셋돈 놓고 간 경우도 있어”
기자는 최근 지하철 7호선의 종점인 장암역에서 직접 유실물을 수거해 보기로 했다. 낮 시간이라서 그런지 승객이 빠져나간 전철에는 빈 커피캔이나 신문지 더미만이 어지러이 널려있을 뿐이었다. 두 대의 지하철에서는 아무런 유실물도 눈에 띄지 않았지만 세 번째 지하철에서 카메라 삼각대 하나와 미술도구가 들어있는 커다란 가죽가방을 발견했다. 동행했던 지하철 기관사는 “노선과 시각에 따라 유실물의 질(質)이나 발견되는 빈도가 천차만별”이라며 “7호선의 경우 노선이 길다 보니 중간에 다른 승객이 유실물을 집어가는 경우가 많아 종점까지 남는 경우가 드물다”고 설명했다. “5년 전 5호선에 근무할 때 수표로 몇 천만원이 들어있던 가방을 찾아준 적이 있다”는 기관사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돈은 전셋돈이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서민이 많이 타는 지하철이라 이런 일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아침이나 낮 시간보다는 막차 시간에 가까워질수록, 평일보다는 금요일과 주말이, 또한 겨울보다는 봄과 여름이 유실물이 많다고도 했다. 날씨가 좋고 쉬는 날이 많아 행락객이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태릉입구역 유실물센터에 따르면 지난 1월 832건, 2월 826건이었던 유실물 접수 건수가 3월 1030건, 4월 1095건, 5월 1164건, 6월 1125건으로 계속 늘고 있다. 기관사는 습득한 카메라 삼각대와 미술가방을 기관석에 갖고 탄 후 7호선 유실물을 관리하는 태릉입구역에 도착해 정차하는 동안 승강장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유실물센터 직원에게 넘겼다.
태릉입구역 유실물센터는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와 유실물을 찾으러 오는 승객들로 분주했다. 유실물센터 직원은 디지털카메라로 방금 접수된 유실물 사진을 찍었다. 서울도시철도공사 홈페이지에 사진을 올리기 위해서다. 공사 홈페이지에 올린 사진은 1999년에 만들어진 유실물종합정보센터 사이트(www.lost114.com
그러나 카메라 삼각대의 경우 이미 오전에 분실 신고가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경우 유실물 인도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물건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 유실물센터에 온 고등학생 정유진(17)양은 “지하철 선반 위에 삼각대를 올려놓았다가 깜빡 잊고 내렸다”며 “학교 물건이었는데 찾게 돼서 정말 다행”이라고 말했다. 정양은 삼각대를 놓고 내린 사실을 알자마자 지하철 역무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정양은 유실물을 처리하는 지하철 측의 시스템보다도 중간에 삼각대를 아무도 집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고 했다. 서울지하철공사 홍보실 직원은 “요즘 하루에 센터로 들어오는 유실물이 100건 정도 되지만 중간에 승객이 집어가는 유실물 건수는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지하철공사의 자료에 따르면 1~4호선에서 발생한 유실물 접수 건수는 2002년 3만3934건, 2003년 3만2453건, 2004년에는 2만9165건으로 점차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서울도시철도공사의 자료를 보면 5~8호선에서 발생한 유실물 접수 건수는 2002년 2만1566건, 2003년 2만7037건, 2004년에는 2만7545건으로 점차 늘고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유실물 건수는 5만5000건에서 6만건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유실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가방과 쇼핑백이다. 그 다음으로는 서류철이나 의류가 많고, 최근에는 휴대폰도 부쩍 늘고 있다. 그 밖에 자전거, 유모차, 휠체어, 오토바이 헬멧, 목발, 신발, 노트북, 성기구 등 다양한 유실물이 창고를 가득 채우고 있다.
서울 지하철에서 각 역과 유실물 센터에 접수된 유실물이 주인에게 돌아갈 확률은 최근 3년간 평균 73%다. 센터의 한 직원은 “유실물이 주인에게 돌아가지 않는 것은 연락처가 없어 찾아주지 못하는 경우와 물건을 보관하고 있다고 연락을 했는데도 개인 사정으로 찾아가지 않는 경우”라고 말했다. 시청역 유실물센터의 직원은 “분실 신고한 유실물이 접수되었다는 전화를 받고도 찾아가지 않는 사람이 상당수”라며 자신의 물건을 경시하는 요즘 세태를 비판했다.
“얼마 전엔 휴대폰을 분실했다는 고등학생의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우리 애 휴대폰 더이상 찾을 필요 없어요’라고 말하는 거예요. 다시 사주려고 한다면서요.” 직원들은 “지하철의 열차번호와 몇 번째 차량에 탔는지를 알면 유실물을 찾을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주인인 척 행세하는 사람 늘어
한 유실물 센터 직원은 “승객들이 오히려 ‘그거 하나 못 찾아내느냐’며 우리한테 화내는 경우도 많다”며 “열차번호를 알아도 다음에 도착할 역과 연계해서 신속하게 물건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에 마치 007작전을 방불케 한다”고 말했다. 몇 정거장을 가는 동안에도 수많은 승객이 타기 때문에 물건이 제자리에 있다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지하철에 놓고 내린 물건을 찾지 못하는 것은 지하철의 유실물 관리 시스템보다 ‘시민의 양심’과 관련된 문제인 경우가 많다. 대학생 김빛나(24)씨는 얼마 전 지하철 1호선에서 복사물이 들어있는 학교 파일 케이스를 두고 내렸다. 그 사실을 알자마자 구로역과 시청역의 유실물센터에 분실 신고를 했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물건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지 못했다. 파일 케이스에는 학교 이름과 연락처가 뚜렷이 적혀 있었다.
“자기한테 아무런 필요도 없는 물건을 왜 가져가는지 모르겠어요. 제자리에만 두면 주인한테 돌아올 텐데요.” 김씨는 시민들의 양심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냈다.
더욱 심한 경우는 자신이 분실한 물건이 아닌데도 주인인 척 행세하려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는 것이다. 유실물이 들어올 경우 품목을 일주일간 게시하도록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악용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주로 역사 내 유실물센터의 게시판이나 인터넷에 올려진 유실물 목록을 보고 찾아오는 사례가 많다. “주로 노트북이나 현금이 든 지갑을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경우가 많아요. 그럴 때는 있지도 않은 노트북 비밀번호를 물어본다거나 하는 방법으로 철저하게 본인인지 확인을 합니다.”
찾아가지 않는 유실물은 어떻게 처리될까? 현금이나 귀금속 같은 귀중품목은 인근 관할 경찰서에 인계하고 그 밖의 물품은 1년6개월간 유실물센터에 보관한다. 그 후 비영리법인이나 장애인단체, 양로원, 고아원 등에 무상으로 제공된다.
유실물센터에서 일을 하고 난 뒤 물건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다는 한 직원은 “쇼핑백에 들어있는 신문꾸러미도 함부로 버릴 수가 없다”며 “누군가에겐 중요한 스크랩 자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날짜가 지난 신문이라도 함부로 버릴 수 없는 귀중품”이라고 말했다.
방현철 주간조선 기자(banghc@chosun.com
※본 기사 작성에는 박국희 인턴기자(freshman2828@naver.com
.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기사제공 ] 주간조선 | 주간조선 기사보기